"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1990년대 대한민국에 순정만화 붐을 일으킨 만화가들의 작품을
'순정만화=로맨스'라는 공식을 깨고 SF 장르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음을
재조명하기 위해 SF 순정만화에 바치는 헌사를 폴라북스에서 기획했다.
중학생 때 친구들이 엄청 순정만화를 보고 그릴 때,
그냥 그림체 이쁜 신데렐라 이야기들이라고 치부하고
동참하지 않았던 나의 편견을 반성하며
순정만화와 학창 시절을 함께 했다면 더 뭉클하고 와닿고,
작품의 세계관이 확장된 스핀 오프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기쁨과
어떻게 재해석했는지 비교하는 재미가 클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전혜진 작가의 <달의 뒷면을 걷다>는
권교정 만화가의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를 오마주한 작품이라고 한다.
원작을 전혀 모르지만, 이 작품만으로도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마주하게 되어서 재미있었다.
이쁜 캔디를 백마 탄 왕자가 구제해 주는 뻔한 로맨스물이라고 순정만화를
쳐다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순정만화와 SF 소설의 컬래버레이션이
얼마나 멋진지 제대로 보여 준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SF 동화 <우주의 속삭임>에서 달의 뒷면에 폐기물로 버려지는 로봇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하면서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는 SF였다.
"달은! 지구인들의! 쓰레기통이! 아니야!"라며
시위를 하는 다이는 생존해 있는 5명의 월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18살 아이이다.
다이는 달의 미래나 달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앞날에는 요만큼의 관심도 없이
그저 자원을 알차게 이용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지구인들이 싫다.
끝없이 월면 모래를 캐내어 특수 유리와 건축 자재들을 만들기 위해
달에 시추공을 뚫어 자원을 캐내더니, 이제는 지구인들이 싫어하고 처리하기 어려운
각종 해로운 유해 물질들과 방사성폐기물들을 달의 뒷면에 가져다 버린다.
그냥 눈에 안 보이는 데 갖다 파묻어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지구인들은,
달에서 태어나 평생 달을 벗어날 수 없는 월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달은 연구원과 엔지니어, 호텔과 관광회사 직원, 관광객들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이지, 누군가 영원히 살아가고 있는 땅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하기야 달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란
달 개발 초기에 아무것도 없던 달에 매혹돼 이주해 온 일부 괴짜들과
지구로 돌아가는 즉시 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 우주암 환자들과
달에서 태어나 결코 지구로 갈 수 없는 월인과 그 아이들의 보호자들뿐이다.
월인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지어 놓은 달 기지 안에서만 살 수 있고
달 기지 밖에서는 숨을 못 쉬어 죽고,
지구에 가면 중력 쇼크로 죽을 거니 더 이상 숫자가 늘어날 일이 없다.
전 우주에 5명이 남았고 줄어들 일만 남은 멸종 위기종 취급하지만
진짜 멸종 위기종을 다루듯 소중히 여기지도 않으니 다이는 시위를 할 수밖에 없다.
월인은 지구에 갈 수 없으므로 아이들이 달에서 방치되지 않고
지구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교육과 복지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계속 새로운 규칙을 제정해야 하므로, 다이는 계속 세계 우주 기구 앞으로 달려갔다.
지구인들이 불쌍한 월인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복지의 첫 번째 수혜자가 되는 게 아니라,
월인의 당연한 권리를 찾고 지구인들이 달의 미래를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깃발이 되고자 했다.
이름 따라간다고 다이의 할아버지가 손녀 딸의 이름을 디오티마라고 지어서 그런 걸까?
다이는 처음으로 달의 뒷면에 내려앉은 존 H. 서얼,
"알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진화하는 영혼" 인 사람의 별명이었던 디오티마라는
거창한 이름이 자신을 계속해서 옭아매고 있다고 싫어했지만,
그저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죽은 후에도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는 영혼이었고
참혹한 죽음을 앞에 두고도 초연하게 지니어스 쌍둥이를 구했던 영웅의 모습이
다이에게도 보였다.
고작 하루 이틀 보았을 뿐인 사람의 이름을 손녀에게 붙여 준 할아버지는
달을 사랑했던 엄마가 죽기 전 마지막까지 지구에 가고 싶어 했던 것과는 달리
달이 좋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은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곳이지만, 지구는 더 이상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가 해 온 지난 일들, 추억, 죽은 아들과 며느리, 토끼 같은 손주들 모두
그가 그리워하는 것들은 전부 달에 있으니 말이다.
달에서 태어나 달을 떠날 수 없다고 법률로 결정지어진 아이가
달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자신의 의견을 묻지 않음에 항의하고
그냥 월인이니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에게
자신도 대학 교육을 받을 권리를 외치며
남들이 정해주는 대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당당히 외치는데
어른으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달의 가치도 모르고 달에 사람이 산다는 생각도 안 하고
달에 관한 일을 멋대로 결정하는 지구인들에게
달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을 맡겨놓지 않을 거라는 소녀의 모습을
응원하게 되는 의미 있는 SF였다.